반야바라밀다

[스크랩] 불생불멸

한미르여 부활하라 2015. 8. 11. 10:52

 

3.앞에서 색과 공, 공과 색, 아니면 인식체계 자체나 존재방식인 오온 모두가 ‘있다. 없다.’ 이런 단견으로 인식될 수 없는 것이어서 그것을 초월하는 어떤 상태가 돼야 한다는 설명을 했어도 사리자는 여전히 그것을 이해하기 위해 공(空)이라는 상을 지어놓고 있음을 부처님은 아시고 그 공상을 짓고 있는 자신의 의식 상태를 상기시켜주기 위해 일단 또 이름을 불러 주위를 경각시키고 정신을 차리게 한 다음 한방 더 쳐줍니다.

 

네가 생각하고 있는 공(空)이라는 것은 불생불멸(不生不滅)이며 불구부정(不垢不淨)이며 부증불감(不增不減)이다. 이 말은 공이라는 것이 일정한 틀이 있어야 나타나기도(生) 하고 없어지기도(滅) 하며 늘기도(增) 하고 줄기도(減) 하며 더럽거나(垢) 깨끗하거나(淨) 할 텐데 그렇지 않다는 것은 공이란 일정한 경지나 틀이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곧 일반적인 인식의 대상이 아닌 어떤 흐름(제행 무상) 그 자체인 것이라는 말을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그 흐름을 어떻게 인지하거나 그 흐름을 알 수 있느냐가 문제인데 그 흐름을 알려 하면 알 수 없고 그 흐름자체가 돼야 한다는 결론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반야심경을 통해 경을 알려고 애를 쓸 것이 아니라 그 자체가 되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 방법을 알려 달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을 텐데 그것은 알려주고, 받고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마치 음식물을 씹으면 어떻게 소화가 돼서 피가 되고 살이 되는 것을 인지되고 알 수 없고, 일단 씹어서 넘기면 그렇게 되는 것이고 그 피와 살을 가지고 인간은 각자의 세상살이를 펼쳐나가면 되는 것입니다. 위의 질문을 고집 하는 마음은 사실 자신은 음식물을 씹지는 않고 어떻게 소화되어 피가 되고 살이 되는지 알지 않고는 음식물을 먹지 않겠다는 주장을 핌으로 자신은 아주 이성적이고 과학적인 사고를 갖고 있는 사람이라고  포장하는 것과 같은 형국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런 사람은 실천을 꺼리는 게으르고 교만한 마음의 술책에 속아 넘어간 어리석은 사람에 지나지 않는 것입니다.

 

결국 씹지 않은 사람은 병에 걸려 고통 받거나 배고파서 죽게 됩니다.

 

 

그런데도 우린 이런 말을 들으면서도 계속 그런 상을 지어내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잘못됐다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마음이 작용하는 순간을 인지하고 그 만들어진 상이 다음에 만들어진 상이나 이미 가지고 있던 상들(기억, 지식, 경험 등)과 연계되어 새로운 상을 만드느라 현재 자신 앞에서 한 시도 쉬지 않고 흐르고(-제행무상) 있는 사건들, 사실들(실상)을 놓쳐 버리게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지 못하는 것이 우리 마음의 존재 방식이라는 것을 깨닫고 인정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공의 특성을 말하면 시선이 자신에게로 돌아와 자신의 인식체계를 초월하는 방향으로 움직여서 그것을 극복하는 무슨 방법을 강구해야하는데 우리는 계속적으로 기존의 사고방식으로 생각을 확장시켜나가기 때문에 다시 더욱 강력한 법상에 붙들려 본질을 보지못하게 됩니다.

부처님은 이런 상황을 인지하게끔 말씀을 하는 것입니다.

 

공(空) 중에는 너희들이 공을 깨닫고자 수행해 나가는 대상인 육근(안, 이, 비, 설, 신, 의), 육경(색, 성, 향, 미, 촉, 법) 그리고 그것들의 의식인 육식도 없는 것이니라. 즉, 공이라는 것은 육근 12처18계도 없다, 형의하학, 형의상학, 물질과 정신 이런 것 가지고는 얻어지거나 알아지는 것이 아니니라.

그래서 종당에는 부처님과 부처님의 법까지도 부인하는 말씀을 하십니다.

불교 교리의 핵심인 12연기법도 없다는 것입니다.

 

무명(無明)도 없으며 무명(無明)이 없는 경계도 없으며 내지 무노사(無老死), 늙고 죽음도 없으며 늙고 죽음이 없는 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12연기의 시작은 무명(無明)이고 끝은 노사(老死)입니다. 이것이 없다고 하는 것이니 불교의 사성(四聖)제 팔정도(八正道)가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없으면 당연히 이것을 설한 부처님도 없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예는 금강경에서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수보리야 32상으로 부처님을 볼 수 있겠느냐? 등)

 

이렇게 실재로 자신 앞에 존재하고 있는 부처님과 부처님의 가르침 까지도 부정하며 공(空)을 이야기 하는 이런 경전의 심정을 이해해야 합니다.(아니면 부처님의 심정)

상을 지어, 머무르는 마음에 지배되는 사고(思考)의 체계로는 진정한 깨달음(아뇩다라삼막삼보리)을 얻을 수 없는 것이니 만일 이것을 모르고 깨달음을 추구하면 부처님과 부처님의 법이 존재하지 않는 것과 같다는 역설적인 이야기입니다.

그러니 ‘있고 없음’의 단견에서 벗어나는 것이 결국 부처님을 존재하게 하는 것이고 곧 부처자체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실상 우리는 12연기도 없어 무명도 없다고 하니까 무명이 없는 경지를 생각해내서 무명이 없는 것은 무엇인가? 에 마음이 머무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무명이 없는 경지도 없다고 하는 것이고 생로병사도 없다고 말하면 또 그 생로병사가 없는 경지를 찾아 헤매니, 부처님은 다시 그 없는 경지도 없다고  경책해서 외부의 정보에 수시로 어떤 대상을 만들거나 그것에 의지하는 우리의 의식작용을 순간에 알아차리고 깨달아 깨어있게 하는 작용을 이 경은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경은 불자라면 마지막 끈으로 생각하고 있는 절대적인 진리(법상)와 그 진리의 본체인 부처님까지도 부정하여 항상 대상에 머무는 우리의 마음을 어디에도 의지 못하도록 은산철벽 낭떠러지 앞에 서게 하여 그 다음 우리로 하여금 진일보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이 경을 통해 뭐 딱히 얻을 것이 없습니다. 단지 진일보하는 발걸음만 필요한 것입니다.

개인적으로 굳이 아뇩다라삼막삼보리가 뭐냐고 묻는다면 나는 이 한 걸음을 내딛는 상황을 말하는 것이라 이야기 하고 싶습니다.

 

 

가섭산 수진암 태현()()()

출처 : 행복자비선원( 수진암)
글쓴이 : 태현스님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