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야바라밀다

[스크랩] 心 無 罣 碍

한미르여 부활하라 2015. 8. 11. 10:53

4.바로 이런 상황(얻을 것이 없는바- 항상 대상으로 작용하는 자신의 마음을 초월하는 상황), 법상까지 모두 버려서 더 이상 의지할 곳이 없는 백척간두에 올라 한 발 앞으로 내딛는 실천을 하는 보리살타는(菩提薩타 依般若波羅密多故) 마음에 장애가 없고 (心無罣碍) 장애가 없는 고로 두려움이 없어(無罣碍故 無有恐怖) 전도몽상하는 마음을 여의어 구경열반에(遠離顚倒夢想 究竟涅槃) 이른다는 말입니다.

 

약간은 헛갈릴 수 있는 부분이지만 가만히 보면 그리 복잡한 내용도 아닙니다.

간단히 말하면 보살이 구경열반에 이를 수 있었던 것은 절대 지혜에도 머무르지 않고 또 무엇을 얻겠다는 마음의 의타심이 없이 굳이 의지했다면 아무것도 의지할 것이 없는 것에 의지해서 열반을 얻었다는 말입니다.

그러니 수행자는 계속적으로 어떤 대상에 마음이 머물러있는 자신의 의식작용에 정신이 팔리지 말고 오로지 직접 실천하며 만일 육근(六根)을 통해 마음이 대상에서 일어났으면 일어나서 소멸되게 그냥 놔두고 의식은 자신의 앞에서 일어나는 순간의 실상에 충실 하라는 의미가 될 것입니다.

 

그렇게 마음에 일어난 것에 대해 머무르지 않으면 감정이나 경험으로 인해 현실을 직시하는데 어떤 걸림과 장애가 없을 것이어서 마음에서 어떤 두려움도 없을 것입니다.

인간에게 있어 두려움이라는 것은 일종의 기억작용입니다. 만일 어떤 이가 총을 처음 본다면 그는 그것으로 위협을 해도 전혀 두려움이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총을 보거나, 아니 총소리만 들어도 두려움에 떠는 것은 그 총에 대한 잔인함의 기억이 직간접적으로 마음에 있기 때문입니다. 즉 마음의 영상에 두려움이 그려져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 모든 것들이 걸림이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런 기억들과 경험들이 장애물이 되는 것입니다. 즉 자신의 눈을 통해 보여진(-머무름) 대상(총)과 이미 알고 있는 총에 대한 이미지(-머무름)가 만나서 새로운 생각을 일으켜(-머무름) 결국 신체의 행동을 지배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총에 대한 과거 현재의 머무름이 없는 상태에는 어떤 두려움도 없어 구경열반에 이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 마음의 걸림과 장애가 공포를 낳고 그것들이 만든 세상이 마치 꿈속의 일처럼 전도된 것들인데 이것을 멀리 여의었으니 절대 자유를 얻는 것은 당연한 이치가 됩니다.

이런 결과는 앞으로 그럴 것이라고 추측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과거, 현재, 미래 삼세(三世)의 모든 부처님들이 반야바라밀다에 의지하여 아뇩다라삼막삼보리을 얻은(三世諸佛 依 般若波羅密多故 得阿뇩多羅三먁三菩提) 사실이 있다는 것입니다. 즉 이미 검증된 것이란 말입니다.

여기까지 사실 반야심경의 모든 개념적 설명은 끝이 납니다.

 

그 다음 구절들을 보면 우리들은 이 경의 여러 가지 시대적 배경과 저술 관계를 예측하게 하지만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마지막으로 부처님의 무한한 자비를 바탕으로 어느 상황에도 상에 연연해 있는 중생들의 근기에 맞춰 이 반야바라밀다는 실천할 수 있는 최소한의 방법을 제시합니다.

 

사실 이 부분부터 반야심경의 결론이며 핵심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쯤에 와서 반야심경에 대한 경외심이 약간 완화되면서, 심한 경우는 약간 미신적인 주술행위가 왜 반야경에 있는지 의문시하며 마지못해 읽어 내려가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반야심경의 모든 핵심은 마지막 구절에 응축돼 있습니다.

그런데 아이러니 하게도 이 주문의 부분에서 반야심경의 가치는 조금 퇴색되는 듯 하는데 어리석은 빈승의 노파심에 지나지 않기를 바랄 뿐입니다.

 

경은 마지막으로 힘주어 이렇게 말합니다.

故知 ! 般若波羅密多 是大神呪 是大明呪 是無上呪 是無等等呪

‘고로 알지어다. 반야바라밀다의 주문은 가장 신비로운 주문이고 가장 밝은 주문이며 최상의 주문이며 더 이상의 주문이 없느니라.’

그러니까 위에서 설명한 복잡한 이야기들 모르더라도 이 주문만 잘 외우면 된다는 말이 되는데 약간 우리의 자존심을 자극하는 부분입니다.

 

지금까지 나는 냉철한 이성을 가진 사람이 이해할 수 있는 반야심경을 열심히 공부했는데 종당에 와서 순진한 할머니들이나 열심히 할법한 주문이나 외우라하니 자존심이 상하는 것이 무리도 아닐 것입니다.

지금과 같이 잘난 사람이 많은 세태에서는 약간 의문을 갖게 하는 요구가 됩니다.

 

지금까지 반야심경을 시작하면서 약간 복잡한 듯한 위의 공(空)에 대한 설명을 나름대로 잘 이해했다고 생각한 사람이 이 부분에 와서 이와 같은 자존심이 발동했다면 그는 그야말로 반야심경을 천 번 만 번, 무조건 수지 독송해야하는 수준에 있는 사람임을 인정해야 합니다.

 

즉, ‘너희들에게 언어나 문자를 통해, 아니 지금 아무리 자세하게 설명하고 눈앞에 밥상을 차려놔도 너희는 실질적으로 그 음식들을 먹지 못하고 이내 밥상을 연구하느라고 정신이 없을 테니 내가 너희에게 밥을 떠서 네 입까지는 가져다줄테니 제발 입을 벌려 꼭꼭 씹어 삼켜 피가 되고 살이 되게 하라!’는 마지막 당부로 이런 말을 한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또 ‘너희가 아뇩다라삼막삼보리를 얻기 위해서 지금 당장 할 일은 이 경의 의미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실천하는 일, 마음에 머무름이 없게 하는 일을 실천하는 것인데 그 작은 실질적인 방법이 바로 이 주문이라도 직접 외우는 것이니라.’

‘주문의 뜻에 연연하지 말라. 그리하여 너희가 모르는 말로 주문을 말하느니라.’

 

주문의 뜻에 연연하면서 외우거나 그 가피력에 연연하여 외우게 되면 또한 큰 상에 집착하게 되어 진정으로 그 가피력을 얻을 수 없으니 무엇을 얻으려는 마음을 내지 않고 단지 그 주문과 하나가 되고, 그 자체가 되며 그 문자와 소리 넘어 또 다른 차원과 일체가 될 때 까지 열심히 소리를 내라는 것입니다.(색을 통해 공으로 가는 것입니다.)

그것이 경을 앞에 놓고 당장 그 경을 뛰어넘을 수 있는 수련을 하는 방법입니다.

 

여기서 주문은 밀교의 영향이니 불교의 역사적 배경니 하는 학술적 의미는 배재하기로 합니다.

그 학설이 사실이든 아니든 모두 내가 직접 보거나 증명할 수 있는 실질적인 사실이 아닌 것은 분명한 사실이며 모두 지난 정보들에 지나지 않기에 그것들의 진위에 연연하여 현재의 실상을 놓치기 보다는 그것들은 심심할 때 따지기로 하고 오히려 그 여러 가지 각각의 시대의 정서와 문화를 방편으로 삼아 중생의 근기에 맞춰 우리에게 가장 빠르고 효과적으로 진리를 깨치게 배려해 주신 제불제보살님들의 마음만 헤아려 열심히 정진하는 일에 충실하면 되는 것입니다.

 

그러고 나서 경은 중생들의 근기에 맞춰 다시 한 번 우리의 욕심을 자극 합니다.

이렇게 하면 능히 모든 고통을 제거하고(能除一切苦) 또한 헛되지 않고 진실한(眞實不虛) 것이니 고로 반야바라밀다가 설하는 주문은 이러하느니라.(故說般若波羅密多呪 卽說呪曰)

 

아제 아제 바라 아제 바라승 아제 모지 사바하.

(이 뜻이 무엇이냐고 생각이 들거나,  뜻을 알지 못하는 주문은 말하기 꺼려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 대부분의 중생심임을 어찌하리.)

 

가섭산 수진암 태현()()()

출처 : 행복자비선원( 수진암)
글쓴이 : 태현스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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