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야바라밀다

[스크랩] 반야심경 맺음법문

한미르여 부활하라 2015. 8. 11. 10:53

 

우리가 이 순간 반야바라밀다를 행하는 방법은 마지막 주문을 잘 암송하는 일입니다.

일단 이 일에 충실해야 합니다.

음절 하나하나, 음절과 음절 사이사이를 지켜보는 것입니다.

그 가운데서 마음에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놓치지 말고 관찰해야 합니다.

어떤 것을 보아도 괜찮습니다. 단지 마음이 그 것을 분별하고 판단하는 단계로 접어드는지 잘 살펴야 합니다.

마음이 가장 잘하는 일은 시비분별 하는 일입니다. 그것이 마음이 하는 주된 일입니다.

그리고 마음의 정체성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물이나 생각을 나누고 분별하여 어떤 판단을 내려야 마음에 안정을 가져온다고 생각이 들고 비로소 그것에 대해 이해했거나 안다고 생각합니다.

 

잠을 이루지 못하는 분들 중에는 밤새 어떤 사건이나 생각이 정리가 되지 않아 잠을 잘 수 없었음을 경험한 적이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정리나 분류가 일어나지 않으면 마음이 불편하다는 것을 알기에 어떤 일이든 자신에게 주어지고 일어난 것은 꼭 판단을 내려놓으려 하는 습성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번뇌라 하는 것입니다.

이런 마음의 작용을 반야심경의 주문을 통해 일단 모두 알아차리고 그 습성을 분명히 파악하는 일이 먼저 수련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마음의 결이 어느 정도 정돈되고 나서 자신의 소원이나 원력을 그 마음결에 싣는 것입니다.

그 결이 생기기 전에 바라는 소원이나 가피력은 설혹 이뤄진다해도 잠시뿐 다음을 기약할 수 없는 불확실한 것이어서 더욱 마음에 조바심만 가중시키고 자신의 탐욕심에 불을 붙이는 격에 지나지 않습니다.

 

만일 열심히 소원을 빌었는데 이뤄지지 않았다면 그 원망의 마음은 어찌할 것입니까? 그것은 오히려 소원을 빌지 않은 것 보다 못한 결과를 갖게 됩니다. 그러니 이런 인간의 기본적인 욕망은 잠시 내려놓고 시작해야 합니다.

그것은 그 욕망을 진정으로 완성시켜주기 위해서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마치 목마른 자가 마실 물을 담기 위해서는 일단 그릇이 필요하고 그 그릇은 구멍이 났거나 찌그러지지 않은 그릇이어야 하기에 우리의 탐진치로 얼룩지고 구멍 난 그릇을 가지고 가피력을 담으려고 하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말아야하는 것입니다.

 

반야심경을 전체적으로 살펴보면, 제일 먼저 '가장 크고 넓고 완전한 최상의 지혜에 이르는 경이 있는데 그것은 마음에 관한 것이다.' 라는 경의 제목을 갖고 그 구체적인 예로 관자재보살이 깊이 반야바라밀다를 행하시면서 오온이 공함을 관하시어 일체의 고액에서 벗어났다고 실질적인 증거를 제시하여 이것이 허망 되고 거짓된 것이 아니라고 처음부터 못을 박아놓고 시작합니다.

 

그리고나서 있는 것과 없는 것, 없는 것과 있는 것의 상대적인 단견에서 벗어나야 함을 강조하는 말로 본론은 이뤄졌는데 결국에는 불교의 핵심 교리인 사성제 팔정도 십이연기법까지 없다고 부정해 가며 ‘있다. 없다’의 단견에 빠지는 相의작용을 깨우쳐 초월됨의 가치를 불성자체와 견주어 강조합니다.

마지막으로 문자와 언어가 갖는 기본적인 한계를 극복하고 실질적인 수행을 통해 진정한 아뇩다라삼막삼보리를 얻게 하는 방법으로 주문을 제시합니다.

 

이 주문을 암송함으로 위에서 글을 통해 일어나는 相의 작용을 극복하고 이심전심의 미묘법문을 취득할 수 있도록 구성돼 있습니다.

그렇다면 불교를 통해 삶의 변화를 추구하는 수행자의 입장에 있는 사람이라면 이 반야심경을 통해 해야 할 일은 공(空)에 대해서 이해하려 하기 보다는 마지막 주문이라도 아상을 내려놓으며 읽어나갈 수 있는 경지를 향해 열심히 소리 내야 할 것입니다.

 

 

반야심경에는 반야가 없다네

붕어빵에는 붕어가 없다네

쥐약은 쥐를 살리는 약이 아니라네

 

 

반야를 찾아 반야를 분석하는 이여!

 

자신의 눈을 보기 위해 자기 눈을 파내지 마시게

내가 눈이 있음을 아는 것은

눈에 세상이 비춰짐을 알기 때문이네

 

눈 안엔 세상이 없다네

눈이 궁금하여

눈에 매스를 대는 순간

눈도 없고 세상도 없다네

 

 

이렇게 되면 ‘그럼 이 반야심경을 통해 어쩌란 말인가!’ 이렇게 푸념을 하게 되고 참 어렵다고 생각이 들게 됩니다.

그러면 그 어렵다고 일어난 마음을 관찰하면 되는 것이니 쉬운 것입니다.

무엇을 정리하고 판단을 내리려 하니까 어려운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사량하는 일을 하지 않으면 짜증이 나기도 합니다. 그것은 인식의 습관을 바꾸는 일인데 그 바꾸는 일은 하지 않고 기존의 인식의 차원에서 이해하려 하기에 둘 간에 충돌이 어렵다고 느껴지고 화가 나기도 하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자동차를 운전하지 못하는 사람이 갑자기 자동차를 운전하라 하거나 본의 아니게 그래야 하는 경우가 생기면 짜증을 넘어 두려움까지 나게 됩니다.

그리고 운전을 하는 일은 무척 힘든 일이라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기존에 운전을 하던 사람은 운전하는 것만큼 쉽고 편리한 것이 없습니다.

 

그러면 비 운전자가 숙달된 운전자가 되기 위해서는 기존에 걸어서 이동하던 습관이나 기존의 잘 걷기 위해 가지고 있던 기술들을 고집해선 결코 운전을 배울 수가 없습니다. 왜냐면 운전을 해서 공간을 이동하는 것이나 기존의 걸음을 통해 공간을 이동하는 것은 동일하지만 그 방법은 완전히 다른 것이기 때문입니다.

즉 둘은 서로 차원이 다른 일입니다. 하지만 손과 발 등을 이용해서 하는 것은 같습니다. 하지만 둘은 분명히 다른 차원의 기술입니다.

 

우리는 제발 걷는 기술을 가지고 자동차를 운전하는 기술이나 그 기술의 세계를 분석해서 안다고 생각하는 게으른 교만심을 부리지 말기 바랍니다.

자동차에 오를 용기가 없다면 그냥 겸손하게 믿고 작은 것부터 실천하고 따르는 진정성을 보이는 것이 현명한 일입니다. 그것이 억울하면 자동차에(다른 차원) 오르는 실천을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과감하게 차원을 달리한 동물이 있으니 그것이 풍경에 달린 물고기입니다.

처마에 달린 물고기가 물의 기운을 빌러 불의 기운을 막기 위해 석가래 끝에 달아놨다고 하면 두두물물 깨달음으로 가득찬 불법의 도량에서 왠지 궁색한 설명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승속을 불문하고 무심히 바람결에 들리는 풍경소리에 눈을 돌려 ‘나도 너처럼 물속에서만의 행복을 추구할 것이 아니라 물속과는 차원이 다른 대지로 나와 창공을 한 번 헤엄치는 용기를 내볼까?’하는 인연을 지을 수 있도록 선사들이 처마끝에 달아놨듯이 이 경을 통해 진정한 자신의 자성을 찾아가는 낯선 세상의 다른 차원으로 들어가는 용기를 내는 것이 이 반야심경이 내는 주문의 소리가 아닐지 생각합니다.

 

 

가섭산 수진암 태현 ()()()

출처 : 행복자비선원( 수진암)
글쓴이 : 태현스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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