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야바라밀다

[스크랩] 색불이공 공불이색

한미르여 부활하라 2015. 8. 11. 10:52

2.그리고 나서 바로 사리자여! 이렇게 이름을 부릅니다. 관자재보살이 오온을 관하여 일체의 고액에서 벗어났다고 실례를 보인 다음 이제 구체적으로 상대를 지목하며 정신 차려 잘 관할 것을 요구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일상에서도 누군가의 이름을 부를 때는 그가 그 순간에 깨어있어 자신을 올곧이 인지하게 함이 들어 있습니다.

저녁밥 때가 되면 어머님은 온 종일 친구들과 딱지치기에, 온갖 재미있는 놀이에 정신이 팔려 있는 아이에게 주위를 환기시켜 마실 나간 정신을 챙겨 현재 일어난 자신의 일(밥 먹을 시간)인지시켜 주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사리자여! 하는 것은 우리의 본성을 부르는 것입니다. 즉 이 이름을 듣는 순간 내 가슴이 콩닥콩닥 뛰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친구들과 하는 재미있는 놀이에 자신의 마음을 빼앗겨 정신없이 그것에만 몰두해 있는 어린 아이와 다를 것이 하나도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 경의 뜻은 무엇일까? 이 설명은 정말 맞는 것일까 아니면 그른 것인가?’ 등등 마음은 자신의 육근을 통해 들어온 모든 정보들을 육식(六識)을 바탕으로 재고 기억하고, 나름대로 판단하고 새롭게 정리 하느라 정신이 없는 것입니다.

마치 놀이에 정신없는 어린 아이들처럼 말입니다. 하물며 이 복잡한 깨달음을 전할 때의 그 당사자들의 생각의 상태는 어떨까요? (-지금 이 순간 우리처럼 자신에게 일어나는 생각에만 머물러 있게 됩니다.)

그런 상황에 제동을 거는 것입니다.

 “아무개여!”

‘사리자여! 색불이공 공불이색(色不異空 空不異色)이고 색즉시공(色卽是空 空卽是色)이니라!’ 단호히 말합니다.

상대가 대충 그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판단할 겨를이 없습니다.

즉 기존의 생각작용을 멈추게 하는 것입니다. 순간에 멍해지는 것입니다.

완전히 서로 반대되는 것을 다르지 않다고 하고 그것이 아애 같은 것이라고 말하니 이 상황에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습니다. 자신의 마음 추수리기에 바쁩니다.

 

색(色)은 물질을 의미하는 것으로 우리가 보고 만지고 느끼는 실체의 것을 말하는데 그것이 실체가 없는 허공과도 같은 것이라는 말을 하며 종당에는 내 눈 앞에 보여지는 물질을 없는 것으로 여기라고 하니 참으로 충격적인 말입니다.

반야심경을 나름대로 이해하고 있다는 사람에게 묻습니다. 여러분은 자신 앞에 보여지는 물질을 공으로 인지 할 수 있습니까?

아무리 새로 등장한 현대과학의 이론을 빌어 양자이론이니 초끈이론 등 기타 물질의 기본성질을 증명하는 과학의 원리가 이해됐다하여 지금 내 손 안에서 만져지고 느껴지는 물질의 존재를 공한 것으로 인지 될 수는 없을 것입니다. 분명히 있는 것은 있는 것이고 보여지는 것은 보여지는 것이고 안 보이는 것은 안보이게 느끼고 아는 것이 우리의 솔직한 입장입니다.

 

이 당연한 현상을 부인하고 부처님의 진리의 말씀이니까 물질(색)을 공(空)으로 알것을 강요하거나 자신을 세뇌 시키려하는 것은 더 큰 오류를 범하게 되는 것이며 그야말로 공상(空想)에 빠지는 지름길일 것입니다.

반야심경은 우리를 그렇게 공상(空相)가의 세계에 떨어지게 하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냉철하게 깨어있어 매 순간 존재하는 현실을 바르게 인지하여 보다 완전하고 자유로운 삶을 살게끔 하는 경입니다.

그렇지 않다면 ‘마하반야 바라밀’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 상대적 개념을 일체화 시키는 말을 듣는 순간 멍해졌다가 이내 다시 본래 마음의 습성으로 돌아와 우리는 바로 두 상대적인 것에 상을 지어, 색(色) 있다는 상(相) 그리고 공(空) 없다는 상(相)을 만들어 놓고 이것을 바탕으로 어떻게 이 서로 전혀 다른 것이 다르지 않다는 것인지? 의문을 가지고 그 상(相)을 각각 나누고 째서 재배열하고 이것저것과 비교해 보기도 하며 이해하려고 노력합니다.

 

그곳에 그런 자아를 인지하는 기능은 없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받아드릴 만큼 분석이 되지 않으면 그 대상을 무시해 버리거나, 아니면 모르기 때문에 그냥 믿으려 애쓰거나 등등 뭐 이런 식으로 마음이 움직입니다.

여기서 잠깐, 여러분의 생각이 ‘그렇게 생각이 움직이는 것이 뭐? 잘못됐는가?’ 이런 쪽으로 움직였다면 아까 말한 친구들 하고 노는 일에 정신이 팔려있는 아이들과 똑같은 마음의 작용에 지배를 받고 있음을 인지하고 인정해야 합니다. 그런 과정이 이 경을 통해 마음 수련을 하는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그 다음에 이내 수(受), 상(相), 행(行), 식(識)도 그러 하느니라. 합니다.

색(色)을 이야기 하니, 보이는 것에만 집착하여 판단하기에 꼭 눈에 보이는 것만이 그런 것이 아니라 부지부식간에 일어나는 수(受), 상(相), 행(行), 식(識) 모두 즉, 오온(五蘊)이 그렇다는 것입니다. 기존에 수행자는 오온(五蘊)을 대상으로 깨우침의 바탕을 이뤄 수행해 왔는데 그것 자체에 혼돈을 주는 말입니다. 여기서 한 번 더 크게 ‘멍’해지는 것입니다.

 

수행자 입장에서는 오온이 없다면 우리는 무얼 가지고 수행해야하는 것인가? 우리는 항상 그것(오온)을 보고 느끼며 알아차림을 가져 깨우침을 향해 간다고 생각했는데. 참으로 난감한 상황입니다.

 

반야심경의 전계 상황을 권투 경기로 보자면 도전자 수보리는 챔피언에 의해 정신없이 얻어맞고 있는 광경입니다. 그것도 숨 쉴 사이도 없이 스트레트에, 훅에 어퍼컷 그리고 다시 스트레이트, 마지막 끝내기 펀치까지 정신없이 맞다가 링 바닥에 쓰러져 새로운 세상을 보게 되어 마지막에 포기하지 않고 로프(주문)를 잡고 일어서는 광경과도 같습니다. 너무 비약이 심한 것 같지만 단순하게 보자면 그렇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온(五蘊)이든 그 무엇이든 대상이 일어나는 순간 마음이 같이 작용하여 그것에 머물게 된다는 이 사실을 인지하고 어떻게 하면 그 상황에 머무는 마음에 빠지지 않고 세상살이를 펼쳐나갈지에 수행의 작은 목표를 삼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리고 그 다음의 경지는 그것이 완성됐을 때 자연스럽게 나타나고 알게 되는 것이니 당장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것부터 하나씩 실천해 나가는 것이 중요한 일입니다.

 

그러니 경(經) 앞에 앉아 '이건 이러네! 저러네!' 이런 시비(是非)만 가리고 있는 일은 자신의 삶을 자유롭게 변화시키는 일에 아무런 도움이 되질 않는 것입니다.

차라리 경(經)을 덮고 이것을 토대로 무엇인가를 실천하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서는 일이 더욱 부처님의 뜻에 가까이 가는 일입니다.

 

그러고 나서 다시 이름을 부릅니다. 사리자여!

 

가섭산 수진암 태현()()()

출처 : 행복자비선원( 수진암)
글쓴이 : 태현스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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