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야바라밀다

[스크랩] 반야심경 법문 中 (오온개공)/태현스님

한미르여 부활하라 2015. 8. 11. 10:51

1.이제 경속으로 들어가서, 경의 이름은 ‘마하 반야 바라밀다 심경’입니다.

 

그 뜻은 마하는 무한히 크고 넓다는 의미이고 반야는 지혜이며 바라밀다는 도피안의 세계를 의미하고 심경은 마음의 경전이라는 의미입니다.

풀어서 설명하면 ‘가장 크고 넓은 최고의 지혜의 세계에 이르게 하는 마음의 경전’이렇게 풀 수 있을 것입니다.

 

여기서는 우리로 하여금 큰 호기심을 일으켜 이 경에대해 궁금하게 하고 즉시 경의 속으로 들어오게끔하는 자극제의 역할을 합니다.

대부분 반야심경을 공부하는 분들은 이 제목부터 긴장하여 상당한 부담을 갖고 그 뜻에 연연하여 본질을 놓치기 쉬운데 특히 여기선 학자적 자세를 지양하고 수행자의 입장에서 어떻게 하면 이 경을 통해 완전한 지혜를 얻을 것인가에 중점을 두면 왠만한 글귀는 부드럽게 넘어가고 받아드려 전체적인 분위기를 파악하는데 관심을 두면 될 일입니다.

 

 

다시 제목으로 돌아가면 이 반야심경은 우리에게 최고의 지혜를 얻게 하는 경전인데 이 중요한 경전은 어떤 특별한 존재의 말씀이거나 아니면 고귀한 경지, 어떤 특별한 대상을 가지고 깨닫는 것이 아니라 단지 모든 이가 갖고 있는 마음을 가지고 깨닫게 하는 경전이라는 것을 추측 할 수 있습니다.-심(心)경(經). 이런 의미로 접근해 봅니다.

 

이제 경은 그 구체적인 실례를 보여줍니다. ‘관자재보살이 깊게 반야바라밀다를 행할 때 가만히 오온(五蘊 -색,수,상,행,식.)를 관하시어 그것이 모두 공(空)함을 깨달아서 일체의 모든 고액에서 벗어났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그러니 무엇인지는 잘 몰라도 ‘깊게 반야바라밀다’를 행하는 것이 중요하며 그 행하는 과정에서 조용히 오온(五蘊 -색,수,상,행,식.)를 관해서 깨달아야 모든 고액에서 벗어 날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우리같이 불교를 실천하는 입장에 있는 사람은 깊게 지혜를 얻게 하는 그 무엇을 직접 행하면서 오온을 어떻게 관해야 하는가에 관심이 가있어야 마땅한 것입니다.

그렇지 않고 문구에 관심을 두고 그 뜻에만 집착하는 마음이 일어났다면 그것은 불교학자적 자세로써 진정으로 지혜를 얻어 실천하고자 하는 불교인의 마음 자세와는 큰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각자 자신의 현재 마음 상태를 되돌아 봐야 합니다.

 

물론 그 마음자세에 어떤 것이 우월하고 바른 것은 없습니다. 각자의 선택의 문제이고 삶의 방식이니 우열은 없습니다. 그러나 자신이 어떤 삶을 추구하며 그 삶을 얻기위해 현재의 마음작용이 그 삶의 방향에 맞게 가고 있는지를 관하는 것은 아주 중요한 일입니다. 이 기준을 갖고 불교의 모든 경전을 대하면 필요 없이 시간을 낭비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 우리는 과연 반야바라밀다가 어떤 것이기에 그것을 행동으로 옮기며 또, 그 과정에서 어떻게 오온을 관해야 하는가?에 관심을 갖게 됐다면 지금부터 이 경을 통해 그 해답을 찾고자 자신을 잘 관하면서 공부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 노력에 이 빈승은 작게나마 나의 경험을 나누는 것이니 잘 참고하셔서 각자의 수행법을 찾아서 잘 실천에 옮겨나가시기 바랍니다.

 

 

이 제목에서부터 우리가 부지불식간에 오류에 빠지기 쉬운데 그것은 어떤 특정한 반야바라밀다의 상을 세우고 또 오온의 다섯 가지 상을 세워서 그것을 외우려 한다거나 그것을 바탕으로 논리를 세우기 시작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사고작용은 당연히 그렇게 움직이니 뭐 특별히 잘못된 것은 없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순간적으로 작용하는 의식을 인지하며 상을 바라보는 것 하고 아애 인지하지 못한체 그 만들어진 현상만 가지고 이해하려 애쓰는 것은 천지 차이가 납니다.

사실 이 경에서도 그런 상황을 놓치지 말고 계속적으로 자신의 마음을 인지할것을 요구하고 있으며 또 그런 연습을 이 경을 읽어나감에 따라 깊게 습득해야 진정 반야바라밀다의 경지를 얻는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빈승은 개인적으로 생각하며 여러분께 이야기를 풀어나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여러분은 저의 말이나 경구의 의미에 연연하는 마음이 일어날 때마다 자신의 마음작용을 놓쳐서는 안 될 것입니다.

사실 이렇게 하는 것이 내가 생각하는 반야심경의 의미며 또한 이 경을 통한 구체적인 수련법이라고 부족한 생각을 해봅니다.

 

 

그래서 이 경의 구체적인 내용으로 들어가기 전에 자신에 대한 입장정리가 되지 않은 사람은 큰 것을 바라지 말고 경에 대한 경외심을 손상시키지 않는 범위 내에서 가볍게 수지독송을 하며 시절인연을 기다리는 것이 나을 수 있습니다. 그건 그렇게 정리하고.

 

 

먼저 오온(五蘊)을 보기로 합시다 오온이란? 간단히 말하면 인간이 인간으로 존재 방식이나 사고(思考)의 인식 체계를 다섯 가지로 나눠 논 것입니다.

즉, 색(色)은 보통 물질을 말합니다. 인간으로 치면 신체입니다. 그리고 수(受)는 신체의 감각기관을 통해 외부의 어떤 자극을 받아드린다는 것을 말합니다. 그리고 그 받아들여진 감각의 신호는 일정한 이미지(상)을 만들며 그 상(想)은 생각을 일으켜(행行) 의식(식(識))을 동반하여 그것에 대해 판단하고 선택하게 만드는데 이렇게 인간이 갖는 기본적인 특성을 다섯 단계로 분화해 놓고 잘 관하라는 것입니다.

이 오온(五蘊)을 다른 말로 오음(五陰)이라고도 하는데 그 의미는 같습니다. 즉 이 다섯 가지로 쌓여있다는 의미나 또는 이 다섯 가지가 음(陰)의 성질을 갖고 있어 발산하는 것이 아니라 서로 흡수하는, 포함하거나 수렴하는 특성을 갖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이 것들은 순간적으로 작용하며 한번 작용하면 서로 분리가 잘 되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간은 집착심이 강하고 서로간에 끈끈한 정에 매달려 사는 특성을 보여주고 있는 지도 모릅니다.

 

이와 같이 오온(五蘊)이란 인간이 사물을 인식하거나 아니면 세상에 존재하는 방식을 다섯 가지로 나눠서 설명해 놓은 것인데 사실 지금과 같이 고도의 지식이 발전된 입장에서 보면 그리 대단한 지식정보도 아니지만 몇 천 년 전 옛날 사람의 수준에서 생각한 다면 이것도 대단한 고급 정보에 해당될 것입니다.

이렇게 가급적이면 간단하게 용어설명을 했는데도 여러분은 아마도 용어의 늪에 빠져서 방금 전에 빈승이 강조했던 말 ‘불교학자적 입장이 아닌 불교인의 자세로써 글을 대하자’라는 말을 잊어버렸을 것입니다.

이제 그 늪에서 나와서 비록 용어가 낯설고 이해가 되지 않는 찝찝한 마음이 있더라도 모두 훌훌 털어버리고 지금 어떻게 수행해 나갈지에 초점을 맞추기로 합니다.

 

 

그러면 이 오온(五蘊)이 공하든 공하지 않든 간에 그것이 뭐 그리 중요하기에 최고의 지혜를 얻는데 그 공함을 깨닫는 것이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것인가?하는 궁금증이 일어납니다.

 

여기서 잠깐 분위기를 전환해야 합니다. 꼭 그렇게 해야 합니다. 이 도그마에서 빠져나와야 하기 때문에 우리는 이 상황을 환기 시킬 필요가 있습니다.

 

 

불교를 역대 학자를 비롯하여 많은 불자들이 크게 소승과 대승으로 나눠놨습니다. 그것의 옳고 그름은 나중 문제고 단지 불교사의 큰 흐름에서 그런 변화가 있다는 것을 인정하자는 것입니다.

초기에는 불교 하나만 있었는데 즉, 소승적(근본불교,원시불교 등) 모습 하나로 유지되어 오다가 어떤 시기에 새롭게 대승이라는 불교의 형태가 나타났다는 것인데 그러면 소승과 대승의 차이를 잘 모르더라도 기존의 흐름 속에서 없던 것이 새롭게 나타난다는 것은 그 기존의 것들을 거부하거나 배척하고, 아니면 열등시한다든지, 아니면 기존 불교가 가지고 있던 한계 등. 그렇게 비약하지 않더라도 새로운 것이 등장하는 것은 일단 기존의 방식과는 차별화 되는 어떤 수행법을 주장하는 불교의 형태가 나오게 된다는 것을 우리는 상식적으로 추측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 맥락으로 대승불교의 입장에서 볼 때 대승경전의 가르침에는 은근히 소승의 수행법이나, 아니면 소승을 따르는 불자들의 한계를 힐책하는 듯한 뉴앙스의 내용들을 적지 않게 볼 수 있습니다.

이런 측면에서 다시 이 반야심경을 보자면, 여기서 키워드인 '오온(五蘊)이 공함을 관했다.' 하는 것은 누군가가, 아니 기존의 수행자 대부분이 오온(五蘊)의 공함을 알지만 스스로는 그 도그마에 빠져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지혜제일이라는 수보리에 빗대여 설해지고 있는 것입니다. (지혜제일인 수보리가 놓치고 있었다면 우리 범부중생들은 어느 정도일지는 스스로 상상하길)

 

 

즉 부처님은 아함경에도 보면 깨달음에 이르는 구체적인 실천 수행법으로 사념처수행을 말하십니다. 요즘 말하는 ‘위빠사나’수행법입니다.

즉, 알아차림과 삼매 수련인데 이 알아차림은 어떤 대상을 계속적으로 인식함을 유지하는 것을 말하는 것인데 그 알아차림을 유지하려면 모양이 있는 것이든 없는 것이든 아니면 감각이든 간에 그 대상에 대한 일정한 상(相)-이미지가 있어야 가능한 것입니다. 그것이 실상(實像)이든 공상(空想)이든 상관 없이 보는 자(알아차림, 깨어있음.)와 보여지는 대상(心所)이 있어야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가 깨닫기 위해 수행을 하려면 일단 마음의 상(心所)을 대상으로  깨우쳐 나가는 방편을 쓰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깨우치다 보면 십중팔구는 그 깨우침을 준 것, 대상에 대한 법상(法相)에 빠지게 되는데 이것 까지도 초월되야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가는 길이 보인다고 반야심경은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대상(이미지,법상)에 끄달려서 그 자체를 보는 눈을 함양하고자 하지 않는, 아니면 그 사실 자체를 인지하지 못하고 있는 기존의 수행자들이나 수행법의 한계를 벗어날 것을 경책하는 의미에서 오온(五蘊)의 공함을 말하는 것입니다.(물론 근본불교-소승불교.도 이런 한계를 벗어나는 수행체계를 가지고 있음니다만.)

즉 제행이 무상하고 제법이 무아인 것을 깨닫게 하기 위해 사물을 인식하는 것도 다섯 가지로 분해해 놓고 세상의 근본 문제인 생로병사의 실체도 열두 가지로 분해해서 십이연기법으로 제시하여 그 실상이 무아(無我)임을 알게 했는데 우리는 각각의 그 분해해 놓은 것들의 상(相)에 또 끄달려서 더 깊은 집착심과 아니면 법상(法相)에 허우적대고 있는 것입니다. 부처님은 이런 상황을 깨우치게 하기위해 ‘너희들이 진리를 깨닫기 위해 수행하고 있는 인식체계인 오온(五蘊)을 통해 순간적으로 지어놓은 법상(-五蘊의 상)을 깨달아라.’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수행자는 지금 오온이 뭔지 깊게 파고들 필요가 없습니다. 그냥 “ 아! 우리가 상을 깬다고 하면서  나도 모르게 새로운 상에 빠져 있구나!” 이렇게 자신의 마음을 돌아보면 되는 것입니다.

이제 다음 대목들은 이런 상황들의 구체적인 상황과 오류들을 지적하여 계속적으로 자신의 순간적 마음을 관할 수 있도록 경책하는 주장자와도 같은 이야기들입니다.

-이런 공(空)사상이 중국에서 선(禪)의 형태로 나타났을 것입니다. 이런 예는 간화선의 화두나, 여러 공안들, 선사어록에서 쉽게 볼 수 있습니다.

 

가섭산  수진암  태현()()()

출처 : 행복자비선원( 수진암)
글쓴이 : 태현스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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