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께서는 12 연기법과 오음이라는 말씀으로 해석을 하십니다. (12 연기법이란? 12가지 요소가 서로 인과 관계를 이루어 가면서 성립되는 것입니다. 무명(無明), 행(行), 식(識), 명색(名色), 6입(六入), 촉(觸), 수(受 ), 애(愛), 취(取), 유(有), 생(生), 노사(老死))
오고 감도 없는 무상의 바탕에서 색수상행식, 오음의 밑바탕에는, 1.있지도 않는 티끌을 일으키고, 2.받아드린다. 3.그리고 모양을 느낀다. 4. 그러므로 움직임이 나타나고, 작용이 표면화된다.) 이것이 오음 곧 '색수상행식'인데, 모두가 허망하고 뜬구름과 같아서 정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근본은 비어 있음이며, 아무 것도 결정적으로 정해진 것은 없다는 말입니다.
그렇지만 허망한 육근작용에 끌리고, 느낌과 감촉의 작용으로 탐욕심과 성내고 싫어하는 마음, 그리고 어리석음이 물결처럼 출렁대며 부침을 거듭한다. 12인연법이 전개되는 과정인 것입니다. 그러나 매우 복잡하고 법위가 넓어서 얼른 이해하기가 어려운 것도 사실입니다. 단순하게 죄를 지으면 벌을 받고 선을 행하면 복을 받는다는 그런 차원이 아니니까요.
그래서 민간에 전해 내려오는 인과응보는 단순하게 선을 행하면 복을 받고 악을 행하면 벌을 받는다는 차원으로 알려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특히 동양의 고대학문인 오행설에서는 목 금 토 화 수와 같이 오행의 상생과 상극의 원리로 풀기도 하지만 아주 일부를 해석 하려는 노력에 불과한 것입니다.
이 난에서는 보다 우리 생활과 가깝고 연관된 이치로 설명을 할까 합니다. 인과의 시작은 바로 이 순간 한 마음 씀으로 시작이 되며 그 감정이 깊이 새겨지고 잠재된 바탕으로 시작이 됩니다.
일단 그 성품은 바람과 같고 아침 이슬과 같으며 무상하지만, 마음속에 간직하고 붙들며 집착을 할 때 그 힘은 작용하고 발휘가 된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라는 말이 있습니다. 사랑과 증오는 상반되는 용어인데요. 사랑이 없다면 증오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증오와 사랑은 한 배에 타고 있는 것이며 같은 말이 됩니다. 또 행복과 불행은 같은 바탕에 있는 것입니다. 행복이 없다면 불행도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사랑하라고 말하지만 그 곳에는 이익과 손해를 논하고, 얻고 구함이 들어 있으며 소유와 베풀음이 들어 있어서 늘 격변합니다. 지극히 사랑한다면 지극히 집착함과 같아서 그때 그 순간은 그렇지만 곧 때가 되면 아쉬움과 배신과 증오로 돌변하는 게 사랑입니다.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자비는 그와 다릅니다. 줌도 없고 받음도 없으며 베푼 자도 없고 받은 자도 없는 절대 평등의 무상한 이치에서 발현되므로 아무리 베풀어도 피로함과 괴로움이 없으며 배신해도 슬픔과 원망심이 없습니다. 그래서 영원한 대자대비가 되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일반 중생심은 그 와는 바탕부터가 다릅니다. 그래서 한마디로 지극한 사랑은 서로가 영 피곤한 것입니다. 그래서 오래 가지도 못합니다.
어떤 사람이 세상에 빚을 지고 신세를 지며, 가족에게 의탁을 하고 여러모로 자기 도리를 다하지 못하고 의존을 한다면 이 자체도 업의 빛이 쌓입니다. 우주 법계에는 어떤 경우라도 일방적인 공짜는 없으니까요. 꼭 돈을 빌려야 빛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때 아무리 갚지 않고 때 먹고 싶지만 되질 않습니다. 이미 마음 깊은 속에 각인되어 있어서 의식이든 무의식이든 내생에서라도 갚아야 된다는 것입니다.
심지어는 소가 돼서 밭이라도 갈아서 갚는 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어디로 도망가도 소용이 없습니다. 자신이 품고 다니기 때문에 의식과 의식이 연결되면서 서로 만나는 것이 인연입니다. 세월이 다르고 얼굴을 몰라도 사는 곳이 달라도 그렇습니다.
또 어떤 사람이 큰 피해를 보고 원한이 생겼다고 가정을 합시다. 그 사람이 너그러워서 피해를 준 원수를 용서 했다고 해도 자신의 마음속에 피해를 본 기억이 아로 새겨져 있는 관계로 깊은 용서는 안 됩니다. 그러므로 자신도 모르게 다음에 원한을 갚게 되는 것입니다. 원하지 않아도 잠재의식이 그렇게 움직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런 주고받는 것을 끊을 수가 있을까 그건 진정으로 무상의 도리를 깨우쳐야만 가능합니다. 피해를 준 자도 없고 피해를 받는 ‘나’도 없다는 대진리를 깨우쳐야만 가능합니다. 아무리 업장을 소멸한다고 기도를 하고 빌고 해도 소용없는 것입니다.
아주 별 것도 아닌 잘못을 깊이 간직하고 큰 잘못으로 인식을 해도 그 과보는 매우 크게 다가옵니다. 예를 또 들겠습니다. 조선시대 여인들이 생명은 정절입니다. 정절을 어떻게 하다가 지키지 못 하였다면 얼마나 크게 고민하고 두려워하며 죄의식을 가지겠습니까. 그렇게 되면 그 별 것도 아닌 것이지만 크게 다음에 작용을 하는 과보를 불러일으키게 되는 것입니다. 학자는 책과 글에 집착을 하고 종교인은 종교에 집착을 합니다. 모두가 집착의 강약에 따라서 외예 없이 그에 따른 결과가 작용을 합니다. 그 결과가 아주 바람직하든 반대로 작용을 하든지 크게 작용을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진정으로 운회의 사슬과 과보의 사슬을 벗어나려고 한다면 그 마음을 평등하게 하고 무상의 도리를 닦는 길 밖에 없는 것입니다. 일체를 뛰어 넘은 비결이 바로 절대 평등심으로 중도의 무상 법을 깨우치는 것입니다. 누구나 아무리 선하게 산다고 해도 과거에 어떤 잠재된 의식이 있으며 어떤 죄를 지었는지 아득합니다. 이런 무수한 쌓임을 다 녹일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무상의 도리를 깨우친다면 산처럼 쌓이고 바다처럼 가득한 업장도 이슬과 같이 녹아들 것입니다.
그 마음을 쓰기로 우주도 세상도 어떤 사상도 진리도 집착할 것도 없고 집착할 이치도 없으며, 얻음도 없고 잃음도 없으며 두려운 일도 본래 없고, 안되고 되는 일도 본래 없으며 과거와 현재 미래가 모두 일시에 공하며 찰라지간이라고 일단 보고 머무른바 없이 닦아야합니다. 수행을 한다면서 고개를 넘고 극복을 하고 단계적으로 무엇을 구하고 얻으려고 하면 안 됩니다. 그런 수행은 다 무의미합니다. 반드시 돈오의 바탕으로 바로 닦아 들어가야만 그나마 성과가 나게 됩니다.
일단 인과의 이치와 그 본 성질을 깊이 알고 나서 그 이치마저도 버려야합니다. 간혹 인과를 배우고서 그 인과에 집착을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계율을 배우고 지키는 분들에게 더욱 심합니다. 작은 인과의 이치로 이익과 손해를 집착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경우는 작은 것에 잡ㅈ착하면서 크게 만들어갑니다. 세상에도 별 것 아닌 걸 크게 여기면 대단히 싸움이 커지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인과의 도리를 배운 다음에는 청정하게 그 마저도 비워야합니다. 그렇지 못하면 인과의 도리 속에 또 파묻히고 말 것입니다.
수련하는 분들이라면 모조리 다 처내 버려야합니다.
능엄경에 나오는 오음의 설명
( 아난아! 너는 아직도 일체의 부질없는 물질인 모든 허깨비 같이 변화하는 모양이 곳을 따라 생기며 곳을 따라 없어짐을 알지 못하는구나. 허망한 허깨비 같은 것을 물질이라고 하지만 그 성품은 참으로 오묘한 깨달음의 밝은 본체이다. 이와 같이 오음(五陰)과 육입(六入)과 십이처(什二處)와 십팔계(十八界) 도 인연이 화합하여 허망하게 생기는 것이며 인연이 흩어져서 허망하게 없어지나니, 진실로 생기고 없어지고 가고 오고 하는 것이 본래는 여래장(如來藏)이어서 항상 머무르는 것이며 오묘 하고 밝은 것이며 흔들리지 않으며 두루 원만한 오묘하고 참다 웁고 변함없는 성품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는구나. 성품의 참되 고 항상한 가운데서는 가고 옴과 미혹하고 깨달음과 나고 죽고 함을 찾아보아도 찾을 수가 없나니라.
아난아! 어찌하여 오음(五陰)이 본래의 여래장인 오묘한 진 여의 성품이라고 하느냐?
아난아! 비유하면 마치 어떤 사람이 청정한 눈으로 맑은 하 늘을 볼 적엔 오직 하나의 맑은 하늘일 뿐이어서 멀리 아무 것 도 없거늘 그 사람이 까닭없이 눈동자를 움직이지 않고서 오래 도록 똑바로 보다가 피로가 생기면 곧 허공에서 또다른 광화 (狂華)가 보이며 또다시 몹시 어지러워 모양이 없는 듯하니 마 땅히 알아라. 색음(色陰)도 그러하니라.
아난아! 이 헛보이는 꽃은 허공에서 생긴 것도 아니며 눈에 서 나온 것도 아니니라. 그러하다 아난아! 만약 허공에서 생긴 것이라면 이미 허공에 서 생겼으니 다시 허공으로 들어가야 할 것인데, 가령 나오고 들어감이 있다면 곧 허공이 아니며 허공이 비어있는 것이 아니 라면 자연 그 꽃 모양이 생겼다 없어졌다 하는 것을 용납하지 못함이 마치 아난의 몸에 다른 아난을 용납하지 못하는 것과 같으니라.
만약 눈에서 나온 것이라면 이미 눈을 쫓아 나왔으므로 다시 눈으로 들어가야 할 것이니 이 헛보이는 꽃의 성품이 눈으로부 터 나왔으므로 마땅히 볼 수 있을 것인데, 만약 보는 것이 있 다면 나갈 적에 이미 허공에 꽃이 있으므로 돌아올 적에 마땅 히 눈을 보아야 할 것이며, 만약 보는 것이 없다면 나갈 적에 이미 허공을 가리웠으므로 돌아올 적에 마땅히 눈을 가려야 할 것이다. 또 헛 꽃을 볼 적에 눈이 응당 가리움이 없을 것인데 어찌하여 맑은 허공이라야 청정하고 밝은 눈이라고 하겠느냐?
그러므로 마땅히 알아야 한다. 색음은 허망한 것이어서 본래 인연도 아니며 자연도 아닌 성품이니라.
아난아! 비유하면 어떤 사람이 손발이 편안하고 모든 뼈마디 가 적절히 조화되었을 때는 홀연히 살아있음을 잊은 듯하여 성 품이 어긋나거나 순함이 없다가 그 사람이 까닭없이 두 손바닥 을 허공에서 서로 비비면 두 손바닥에서 허망하게 껄그럽거나 미끄럽거나 차거나 뜨거운 여러가지 모양이 생기는 것과 같으 니 마땅히 알아라. 수음도 역시 그러하니라.
아난아! 이 여러가지 허깨비같은 허망한 접촉이 허공에서 부 터 온 것도 아니며 손바닥으로부터 나온 것도 아니니라. 그러하다 아난아! 만약 허공에서 왔다면 이미 손바닥에 접촉 하였는데 어찌 몸에는 접촉하지 아니하였느냐? 응당 허공이 이 를 선택하여 와서 접촉하지는 않을 것이다. 만약 손바닥으로부 터 나왔다면 손바닥이 합하기를 기다리지 않아야 할 것이다.
또 손바닥에서 나왔으므로 합할 적에 손바닥이 느낀다면 뗄 적에는 접촉이 들어가서 팔과 손목과 골수들이 응당 들어갈 때 의 자취를 느껴야 할 것이니라. 반드시 느끼는 마음이 있어서 들어가고 나감을 안다면 자연 한 물건이 몸 가운데 오갈 것인 데 어찌 손바닥과 합해져야만 느끼는 것을 접촉이라고 하느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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