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주 한씨

[스크랩] 청주한씨 양절공파 돌림자 및 정보

한미르여 부활하라 2013. 12. 21. 12:04

   양절공파 韓 確( 확) 13세

 

26세

27세

28세

29세

30세

31세

32세

33세

○(裕)

(用)○

○(履)

○(敎)

○(錫)

○(洙)

(相)○

○(熙)

○(悳)

34세

35세

36세

37세

38세

39세

40세

41세

○(奎)

○(載)

(鍾)○

(鎭)○

(承)○

(澈)○

○(根)

○(杓)

(憲)○

(炳)○

○(均)

○(重)

○(鎬)

○(鉉)

(泰)○

(源)○

 

 

공안공파(恭安公派) () 치인(致仁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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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도공파(章悼公派) () 치의(致義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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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간공파(莊簡公派) () 치례(致禮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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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는 청주한씨 정보입니다.

 

 청주한씨(淸州韓氏)에 대(對)하여

 

1. 청주한씨 시조 : 란(韓蘭)

 

2. 청주한씨 유래 :

 

청주한씨(淸州韓氏)의 유래(由來)는 후조선 (後朝鮮)인 기자조선(箕子朝鮮)에서 기원(起源)다.

(馬韓) 원왕(元王)의 아들 3인이 있어 우평(友平), 우량(友諒), 우성(友誠)이니, 나라가 쇠(衰)하자 우평(友平)은 고구려(高句麗)에 입사(入仕)하여 북원선우(北元鮮于氏)가 되고, 우량(友諒)은 신라 (新羅)에 입사하여 상당(上黨韓氏) 즉 청주한씨(淸州韓氏)가 되었고, 우성(友誠)은 백제(百濟)에 입사하여 덕양기(德陽奇氏)가 되었다고 하는데, 우리나라 (韓氏)는 모두 기자(箕子)의 휴예(後裔)가 되는 것이다. 기자는 은(殷)나라의 종실(宗室)로서 주왕(紂王)의 숙부(叔父)가 된다. 주왕((紂王)이 잔인하고 포악하여 국정(國政)이 쇠퇴함으로 주나라 무왕(周. 武王)이 이를 토멸하고 기자(箕子)에게 치국(治國)하는 대도(大道)를 청문하기로 홍범(洪範)을 자문하여 주고. 의리상 신복(臣僕)이 될수는 없다하여 고조선(古朝鮮)에 망명(亡命)하였는데 때마침 단군조선(檀君朝鮮)이 종말을 고하게 되자 백성들의 추대를 받아 후조선(後朝鮮)을 건국하고 예의(禮儀)로 교화(敎化)하여 예의군자국(禮義君子國)이 되었다고 다.

 

청주한씨(淸州韓氏) 시조(始祖) 란(韓蘭)은 지금의 충청북도(忠淸北道) 영동군 황간면 난곡리에서 탄생(誕生)하여 향학(鄕學)을 일으키고 청주(淸州) 방정리에 무농정(務農亭)을 세우고 농업(農業)을 권장하여 마침내 부농을 이루었는데 이때에 왕건(王建)이 고려(高麗)를 창업하는 공(功)을 세워 개국공신(開國功臣) 이 되었으니 벼슬은 삼중대광 태위(三重大匡 太尉)이다

 

천지는 신묘(神妙) 위광(威光)으로 강산의 기이(奇異)함을 만들고 영웅(英雄)의 자품을 타고나서 나라의 훈업을 이루었으니 란(韓蘭) 그의 시호(諡號)는 위양(威襄)이라 하였다. 속리산맥을 타고 내려와 황간(黃澗) 땅에 이르러 우뚝 솟은 지장영봉(芝庄靈峰)은 사위(四圍)를 거느리고 멀리 백리에 뻗쳐 영기(靈氣)가 모였으니 이곳에서 당대의 위인(偉人) 란(韓 蘭)이 탄생하셨다. 옛부터 전하는 말에 의하면 태조(太祖)가 견훤(甄萱)을 정벌하려 청주(淸州) 고을에 당도하자 태위공께서 군례(軍禮)을 갖추고 이를 맞이하여 창고에 비축 곡식을 풀어 10만 군사를 배불리 먹이고 참전하여 전공을 세워 고려 왕조의 터전을 다졌으니 참으로 위대 분이다.

 

이세(二世) 영(穎)의 벼슬이 용호군 교위(龍虎軍 校尉) 이고 삼세(三世) 상휴(尙休)는 별장 동정(別將同正)이다. 그리하여 여음(餘蔭)이 후세까지 끼쳐 공경대부(公卿大父)가 이어 왔으니 묘(墓)는 충북 청원군 남일면 가산리에 안장하였고 묘비· 신도비 (神道碑)와 청주시 방서동의 무농정(務農亭)과 방정(方井) 제단비(劑壇碑)는 후손들의 정성의 표상이다. 특히 충북 영동군 황간면 난곡리 입구(入口)에는 태위공의 탄생지 유허비(遺墟碑)가 세워졌으며 공(公)의 묘하(墓下)에는 세일재 (歲一齋)가 세워져 있다.

 

3. 청주한씨 본관연혁

청주(淸州)는 충청북도 도청소재지이다. 삼시대에 마의 땅이었다가 백제시대에는 상당현(上黨縣), 일명 낭비성(娘臂城) 또는 낭자곡(娘子谷)이라고도 하였다. 685년(신라 문무왕 5) 서원소경(西原小京)을 두었고, 757년(경덕왕 16) 서원경(西原京)으로 승격하였다. 940년(고려 태조 23) 청주로 지명을 고쳤고 983년(성종 2) 청주목이 된 뒤 995년(성종 14)에는 절도사를 두었다. 1012년(현종 3)에 안무사로 바뀌었다. 1018년에 전국에 8개 목(牧)을 설치함에 따라 다시 청주목이 되고, 양광도(楊廣道)에 소속되었다. 1310년(충선왕 2)에 주(州)로 강등되었다가, 1356년(공민왕 5)에 다시 목으로 복구되었다. 조선시대에도 청주목을 유지하면서 충청도의 정치·행정의 중심지 역할을 했으며, 1651년(효종 2)에는 충청도의 병마절도사영이 청주로 이전되어 충청도의 군사적인 중심지도 겸하였다. 그러나 역모사건 등으로 1656~1667년, 1681~1689년, 1804~1813년, 1826~1834년, 1862~1871년 등 여러 차례 서원현(西原縣) 등으로 강등되기도 하였다.1895년(고종 32) 지방제도 개정으로 공주부 청주군이 되었고, 1896년에 충청북도 청주군이 되었다. 1906년 관찰사를 충주에서 청주로 이전함으로써 충청북도의 주도(主都)가 되었다. 1914년 군면 폐합으로 청주면이라 개칭하였고, 1931년에는 지방제도 개정에 따라 읍으로, 1946년에는 청주부(淸州府)로 승격하였다. 1949년 지방자치법에 따라 청주시로 개칭하였고 1983년 전국 행정구역 조정으로 청주시 지역이 크게 확대되었다. 1995년 동부·서부 출장소가 동부는 상당구로, 서부는 흥덕구로 승격하여 현재 상당구·흥덕구 2개 구가 있다.

 

4. 청주한씨 양절공파 13세 확(韓確)에 대(對)하여

 

1403년(태종 3)∼1456년(세조 2). 조선 초기의 문신.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자유(子柔), 호는 간이재(簡易齋). 지순창군사(知淳昌郡事) 영정(永矴)의 아들이며, 덕종의 비(妃) 인수왕후(仁粹王后)의 아버지로, 성종의 외할아버지가 된다.

1417년(태종 17) 진헌부사(進獻副使)가 되어 노구산(盧龜山) 등과 같이 명나라 성조(成祖)의 후궁으로 선발되어 명나라에 들어가는 황(黃氏)와 누나를 호송하였고, 누나가 여비(麗妃)로 책봉되자, 명나라의 광록시소경(光祿寺少卿)에 제수되었다.

1418년 태종의 양위로 세종이 즉위하자 승습사(承襲使)로 명나라에 들어갔고, 1419년(세종 1) 1월 명나라의 책봉사(册封使)가 되어 부사인 홍려시승(鴻臚寺丞) 유천(劉泉)과 함께 귀환하였다.

1420년 1월 광록시소경으로서 예조참판 하연(河演)과 함께 명나라에 가서 태종 이래 추진하였던 금과 은의 공물면제를 주청하여 허락받고 귀국하였다.

1424년 명나라 성조가 북정(北征) 중 유목천(楡木川)에서 죽자 여비는 그의 비보를 듣고 자결하였는데, 명나라에서는 또 그의 누이동생을 선종(宣宗)의 후궁으로 간선하자 1429년에 조종생(趙從生)과 함께 진헌사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후 명나라 사신이 입국할 때마다 선위사(宣慰使)로 파견되어 접대하였다.

1435년 행중추원부사·지중추원사 등을 거쳐, 1438년 중추원사, 1439년 판성부사·경기도관찰사 등을 역임하였다.

1440년 병조판서·함길도도관찰사 등을 지내고, 1443년 동지중추원사로 의금부제조를 겸하였고, 1446년까지 이조판서를 역임하면서 인사에 공정을 기하여 자못 명망이 있었다.

1446년 판중추원사가 되고, 이듬해 평안도도관찰사 겸 평양윤으로 파견되고, 1448년에는 병마절도사까지도 겸대하였다.

1450년(문종 즉위) 판중추원사를 지내고, 이듬해 사은사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452년(단종 즉위) 좌찬성이 되고, 1453년 계유정난 때 수양대군(首陽大君)을 도와 정난공신 1등에 책록되고 서성부원군(西城府院君)에 봉하여졌다.

1455년(세조 1) 좌의정이 되고, 좌익공신 1등에 오르고 서원부원군(西原府院君)에 개봉되었다.

1456년 사은 겸 주청사로 명나라에 가서 세조의 왕위찬탈을 양위라고 명나라를 설득하였다. 귀국 도중 사하포(沙河浦)에서 죽었다. 누나와 누이동생이 명나라 성조와 선종의 총애를 받음을 계기로 현달하였지만, 넓은 도량과 온간(溫簡) 성품으로 상하의 신망이 있었으며, 명나라 황실과의 유대와 공정하고 결단성 있는 정사로 외교와 내치에 크게 공헌하였다.

1470년(성종 1)에 세조묘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양절(襄節)이다.

 

출처 : 할아버지, 할머니 블로그
글쓴이 : 한영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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